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수천 년의 기도가 겹겹이 쌓인 고대의 돌들은 신성한 침묵 속에서 역사의 무게를 속삭인다. 그곳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 텔아비브의 '실리콘 와디(Silicon Wadi)'에서는 한 스타트업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마무리하며 미래를 향해 질주한다. 이 극명한 대조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품고 있는 핵심적인 역설을 드러낸다. 고대의 신앙에 깊이 뿌리내린 동시에 초현대적 혁신으로 약동하는 나라. 이곳은 약속의 땅이자 영원한 분쟁의 땅이며, 신성한 언약의 땅이자 군사적 명령이 지배하는 땅이다. 2000년의 유랑으로 정체성을 다지고, 격렬하고 논쟁적인 귀환으로 역사를 다시 쓴 민족의 땅이다. 이 작고 척박하며 자원도 없는 땅이 어떻게 세 개의 세계 종교의 중심지가 되고, 세계 지정학의 무대에서 단 한 순간도 내려온 적 없는 상수가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4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 가족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국가의 탄생과 파괴, 방랑과 귀환, 그리고 끝나지 않은 투쟁의 연대기를 따라가야만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 기록 이전에, 수천 년간 한 민족의 정체성과 행동을 규정해 온 강력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한 민족'의 창조와 그들이 신, 그리고 땅과 맺은 독특한 관계에 대한 서사이다. 족장의 도박: 한 민족의 탄생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여정은 주변의 다신교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보이지 않는 유일신과의 '언약'으로 정의되는 한 민족의 기원 서사다. 이 언약은 '약속의 땅'이라는 개념을 역사에 처음으로 각인시켰다. 그의 혈통은 아들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로 이어진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후 '신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조가 되어 민족의 신화적, 사회적 기반을 형성한다. 이 지점에서 세계사의 가장 오래고 깊은 균열 중 하나가 발생한다. 유대-기독교 전통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낳은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보는 반면, 이슬람 전통은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그 자리에 놓는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모두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받는다는 사실이다. 이 공통의 조상은 이스라엘 민족(이삭의 후손)과 아랍 민족(이스마엘의 후손)의 관계를 단순한 이방인의 관계가 아닌, 형제의 관계로 설정한다. 이로 인해 그들의 갈등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상속권, 즉 신의 축복과 약속의 땅을 둘러싼 '가문의 분쟁'이라는 훨씬 더 내밀하고 감정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이 고대의 이야기는 현대의 분쟁을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강력한 렌즈를 제공하며, 영토 문제를 운명과 권리에 대한 우주적 드라마로 승격시킨다. 이는 타협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각자의 핵심 정체성과 신의 은총이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집트로부터의 복수: 속박과 자유 속에서 단련된 정체성 질투에 눈이 먼 형제들에게 노예로 팔려가 이집트의 권력자가 되고, 결국 기근으로부터 가족을 구원한 요셉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거주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그러나 새로운 파라오 왕조 아래 그들은 노예로 전락하고, 이 시기에 마지못해 지도자로 나선 모세가 등장하며 민족사의 거대한 전환점이 마련된다. 열 가지 재앙, 홍해의 기적, 그리고 40년간의 광야 방랑으로 이어지는 출애굽(엑소더스) 서사는 뿔뿔이 흩어진 노예 집단이 해방이라는 공동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통일된 민족으로 단련되는 용광로였다. 언약과 율법: 구별된 민족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의 독특한 법적, 도덕적 틀을 확립했다. 이 순간, 야훼는 그들의 신이 되고 그들은 그의 율법을 따르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이 공식화된다. 이로써 지리나 왕이 아닌, 공유된 종교-법률 규범에 기초한 민족 정체성이 탄생했다. 법과 문자에 기반한 이 '휴대 가능한 정체성'은 훗날 기나긴 디아스포라 시대에 민족이 생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정치적 주권의 극적인 흥망성쇠를 다룬다. 황금기의 도래와 그 후 2500년간 유대 민족의 역사를 규정하게 될 비극적인 분열과 붕괴의 이야기다. 목동 왕의 한 수: 이스라엘의 통일 '사사(판관)'라 불리는 지도자들이 다스리던 느슨한 부족 연맹 시대를 지나, 백성들은 블레셋과 같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왕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이 추대된다. 그 뒤를 이은 다윗의 등장은 정치적, 군사적 전략의 교본과도 같다.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의 이야기는 거대한 힘에 맞선 신앙과 지혜의 승리라는 강력한 민족 신화로 자리 잡았다. 다윗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출신 지파인 유다 지파의 헤브론에서 처음 통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남북으로 나뉜 부족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수도가 절실했다. 그의 해결책은 남쪽 유다 지파와 북쪽 베냐민 지파(사울 왕의 출신 지파)의 경계에 위치했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여부스 족의 도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 천혜의 요새를 점령함으로써 예루살렘은 특정 지파의 도시가 아닌, 왕에게 직속된 도시가 되었다. 나아가 그는 민족의 가장 신성한 상징물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한곳에 융합시켰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행정 수도를 넘어 이스라엘 신앙의 우주적 중심지로 거듭났다. 3000여 년 전 다윗의 이 단 한 번의 결정은 예루살렘이 오늘날까지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중심적이고 폭발적인 역할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이 결정은 도시의 운명을 유대 민족의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과 영원히 결부시켰고, 이 연결고리는 현대의 정치적, 종교적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솔로몬의 황금시대 (그리고 그 대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 왕국은 부와 권력의 정점을 맞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예루살렘에 제1성전을 건축한 것이다. 이 웅장한 건축물은 언약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모든 종교 생활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황금시대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솔로몬의 대규모 건축 사업과 과도한 세금, 강제 노역은 특히 북쪽 지파들의 극심한 반감을 샀다. 분열된 왕국, 정복당한 민족 기원전 931년경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둘로 쪼개진다. 북쪽의 10개 지파는 '이스라엘 왕국'으로,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다윗 왕조에 충성을 바치며 '유다 왕국'으로 나뉜다. 북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아시리아인들은 이스라엘 지도층을 강제 이주시키고 그 땅에 이민족을 정착시켜, 훗날 '사마리아인'으로 불리는 혼혈 민족을 탄생시켰다. 이 사건은 '잃어버린 10지파'의 전설을 낳았다. 남유다 왕국은 100여 년을 더 버텼지만, 결국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한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군대는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하고 유다의 지도층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이는 고대 유대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바빌론 유수'의 시작이었다.
이 장에서는 유대 민족 역사상 가장 놀라운 전환을 분석한다. 국가와 성전을 모두 잃은 한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2000년을 버텨낼 새롭고 더 강인한 형태의 정체성을 구축했는지를 탐구한다. 바빌론의 용광로: 희생 제사에서 경전으로 성전의 파괴는 심오한 신학적 위기를 초래했다. 중앙 성소와 희생 제사 없이 어떻게 신을 경배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절망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현대 유대교가 탄생했다. 성전이 사라진 바빌론에서 유대인 공동체는 예배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했다.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율법(토라)을 읽고, 그 의미를 토론하는 '회당(Synagogue)' 중심의 예배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성전에 묶여 있던 제사장의 역할은 줄어들고, 텍스트를 해석하는 서기관과 현자들의 권위가 커졌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율법과 역사, 예언들이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집대성되어 히브리 성경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안식일 준수, 정결한 음식법(코셔), 할례와 같은 종교적 규율을 더욱 철저히 지킴으로써 이방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혁명적이었다. 종교적 실천의 중심이 단일한 물리적 장소(성전)에서 공동체 기반의 분산된 실천(회당)으로, 동물을 바치는 제의 중심 시스템에서 텍스트를 연구하는 시스템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는 유대인의 정체성이 더 이상 땅이나 국가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제 유대교는 토라 두루마리만 있으면 세계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완전한 파국이었던 바빌론 유수는 역설적으로 유대 민족의 장기적 생존을 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2000년의 디아스포라 기간 동안 그들이 응집력 있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텍스트와 의례로 이루어진 '휴대 가능한 조국'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랍비 유대교의 DNA이다. 제국의 그림자 아래서: 반란과 파멸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관용 정책의 일환으로 유대인들의 귀환과 성전 재건을 허락한다 (기원전 538년경). 제2성전이 완공되었지만, 유대는 페르시아, 그리스 등 거대 제국의 변방 속주로 남았다. 그리스 제국의 지배 아래 헬레니즘 문화 강요 정책은 마카베오 반란(기원전 167년)을 촉발했고, 이 성공적인 게릴라전은 하스몬 왕조 아래 잠시나마 독립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로마의 정복이 뒤따랐다. 처음에는 비교적 관대했던 로마의 통치는 점차 폭압적으로 변했고, 결국 제1차 유대-로마 전쟁(서기 66-73년)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로마는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서기 70년, 제2성전을 파괴했다. 이는 바빌론 유수의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마지막 저항이었던 바르 코크바 반란(서기 132-135년)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로마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하고 속주의 이름을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개명하여 유대적 흔적을 지우려 했다. 위대한 디아스포라: 세계 속의 다양한 유대인의 삶 '디아스포라(흩어짐)'는 흔히 로마와의 전쟁 결과로 여겨지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유대인 공동체는 로마 전쟁 이전부터 이미 바빌론, 이집트 등지에 자발적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심지어 디아스포라 공동체 중 상당수는 추방된 유대인의 후손이 아니라, 현지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로 구성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강제로 추방되어 2000년간 귀환을 염원한 단일 민족'이라는 전통적 서사는 후대에 시온주의라는 민족주의 운동의 정치적, 감정적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구성된 강력한 신화였다. 이 신화는 개종의 역사를 지우고 귀환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역사는 때로 정치적 필요에 의해 신화와 결합하여 민족 정체성을 창조하며, 이 '추방의 신화'는 스스로가 묘사한 바로 그 귀환을 현실로 만드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기나긴 디아스포라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다양한 삶을 살았다. 기독교 유럽에서: 주기적인 박해, 학살(포그롬), 추방의 역사 속에서도 지적, 문화적 꽃을 피웠다.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금융업 등에 종사하며 유럽 경제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동시에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았다. 이슬람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딤미(dhimmi, 보호받는 이교도)'로서 더 관용적인 환경에서 생활했다. 스페인(레콩키스타 이전), 북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상당한 문화적, 상업적 통합을 이루었다. 하위 집단의 형성: 이러한 오랜 분리는 뚜렷이 구분되는 유대인 문화 정체성을 낳았다. 중부/동부 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짐(Ashkenazim), 스페인/포르투갈 출신의 세파르딤(Sephardim), 그리고 중동/북아프리카 출신의 **미즈라힘(Mizrahim)**이 그들이다. 이 문화적 다양성은 훗날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중요한 내부 갈등 요인이 된다.
이 장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의 지각변동을 다룬다. 고대의 귀환의 꿈이 민족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세계 대전이라는 현대적 현실과 충돌하는 격동의 시기이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정치적 시온주의의 탄생 '시온(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픈 고대의 종교적 열망은 유대인의 기도문 속에 항상 존재해왔다. 19세기 후반, 이 종교적 희망은 '시온주의(Zionism)'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탈바꿈했다. 그 촉매제는 러시아의 포그롬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근대적, 인종적 반유대주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하며 유대인의 동화는 불가능하며 유일한 해결책은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총회를 조직하여 "국제법에 의해 보장되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팔레스타인에 건설한다"는 운동의 목표를 확립했다. 강대국들의 게임: 세 번 약속된 땅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의 붕괴는 중동에 힘의 공백을 만들었다. 동맹과 자원이 절실했던 영국은 이 지역을 두고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약속을 남발했다. 맥마흔-후세인 서한 (1915): 메카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 등 아랍 지도자들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면 전후 아랍 독립 국가를 약속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 프랑스와 비밀리에 전후 중동 지역을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며 아랍 독립 약속을 정면으로 위배했다. 밸푸어 선언 (1917):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영국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인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건설을 호의적으로 본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에 현존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해져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세 문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약속이었다. 영국은 사실상 같은 땅을 아랍인, 자신들(과 프랑스), 그리고 시온주의자들에게 각각 약속한 셈이다. 특히 밸푸어 선언의 표현은 의도적으로 모호했다. '민족적 고향'은 '국가'와는 다른 표현이었고, 당시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비유대인 공동체'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조항은 결국 실천되지 않았다. 이 외교적 이중, 삼중 플레이는 한 세기에 걸친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이는 시온주의 운동에 강대국의 지지라는 날개를 달아주는 동시에, 자신들이 이용당하고 버려졌다고 느낀 아랍인들에게는 깊은 배신감과 불의를 안겨주었다. 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진공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이기적인 제국주의 정책에 의해 직접적으로 잉태되었다. 이 깨진 약속들과 밸푸어 선언의 내재적 모순의 유산이야말로 이 분쟁의 원죄라 할 수 있다.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한 약속, 두 민족의 땅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국제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부여받았다. 위임통치 기간(1920-1948) 동안 유대인 이민(알리야)은 급증했고, 특히 유럽에서 나치즘이 부상하면서 그 흐름은 더욱 거세졌다. 시온주의자들은 토지를 매입하고 자치 기구(이슈브, Yishuv)를 설립하며 국가 안의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이러한 유대인 인구의 유입과 세력 확장은 자신들의 땅과 정체성을 위협받는다고 느낀 현지 아랍 주민들과의 긴장을 격화시켰다. 1929년 헤브론 학살 과 1936-1939년의 대규모 아랍 반란 등 폭력 사태가 빈번했다. 아랍 반란은 유대인 민병대 하가나(Haganah)의 도움을 받은 영국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지만, 이는 시온주의에 대한 아랍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깊은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홀로코스트의 그림자와 이스라엘의 탄생 나치 독일에 의한 600만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는 엄청난 규모의 난민 위기를 낳았고, 시온주의의 대의에 거부할 수 없는 도덕적, 정치적 시급성을 부여했다. 격화되는 폭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된 영국은 결국 위임통치를 포기하고 이 문제를 신생 국제기구인 유엔에 넘겼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하에 둔다는 내용의 결의안 181호(분할안)를 통과시켰다. 유대 지도부는 이 안을 수용했지만, 아랍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거부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는 바로 그날, 유대기구 의장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 마지막 장에서는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격동의 역사를 살펴본다. 생존을 위한 투쟁, 논란 많은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 내부의 사회적 균열, 그리고 놀라운 경제적 변혁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불 속에서 태어난 국가: 생존과 지배를 위한 전쟁들 독립 선포 다음 날,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5개 아랍 연합군의 침공을 받으며 **1948년 독립전쟁(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필사적인 생존 투쟁이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나크바(Nakba, 대재앙)'였다. 이 전쟁으로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집을 떠나거나 추방당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난민 문제를 낳았다. **1956년 수에즈 위기(제2차 중동전쟁)**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가 이집트를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강력한 압박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 사건은 옛 식민 강대국의 몰락과 미소 양대 초강대국의 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은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이스라엘은 기습적인 선제공격으로 단 6일 만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전쟁으로 이집트로부터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를, 요르단으로부터 서안 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 압도적인 승리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세 배로 넓혔고, 2000년 만에 예루살렘을 다시 유대인의 통제하에 두게 했다. 많은 종교적 유대인들은 이를 기적적인 신의 개입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승리는 이스라엘을 수백만 팔레스타인인을 통치하는 점령국으로 만들었다. 6일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당면한 실존적 안보 위협을 해결하고 '전략적 깊이'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훨씬 더 복잡한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점령은 강력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시켰고 ,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점령지(특히 성서의 '유다와 사마리아' 땅인 서안 지구)를 신의 약속의 일부로 간주하여 반환을 종교적 금기로 여기는 메시아주의적 신념을 강화시켰다. 이 승리는 또한 이스라엘 군부에 군사적 무적성이라는 오만함('콘셉치아')을 심어주었다. 결국 1967년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군사적 승리인 동시에, 가장 다루기 힘든 정치적, 도덕적 딜레마의 시작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절멸 위협은 내부로부터의 점령이라는 부식성 강한 도전으로 대체되었고, 이 도전은 오늘날까지 분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안보를 제공해 준 바로 그 영토가 장기적 평화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것이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은 이러한 무적 신화를 산산조각 냈다. 유대교의 가장 성스러운 날인 대속죄일에 감행된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허 찔렀고, 전쟁 초반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스라엘은 결국 전세를 역전시켜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다. 이 전쟁은 아랍 국가들도 현대적인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이 결코 무적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 충격은 양측 모두에게 끝없는 전쟁의 무익함을 깨닫게 하여, 훗날의 평화 협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평화의 주역과 파괴자들: 평화를 향한 험난한 길 1973년 전쟁의 충격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이라는 극적인 돌파구를 낳았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가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는 대가로 아랍 국가 최초로 완전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 용감한 결정으로 사다트는 훗날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오슬로 협정(1993)**은 또 다른 희망의 순간이었다. 노르웨이에서의 비밀 협상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상호 존재를 인정했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수립하고,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며, 5년 내에 '두 국가 해법'에 기반한 최종 평화 협정을 맺는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오슬로의 꿈은 좌절되었다. 협정은 예루살렘의 지위, 국경, 난민 문제 등 가장 어려운 쟁점들을 '최종 지위 협상'으로 미뤘지만, 이 협상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우익의 반발이 거세졌고, 결국 1995년 유대인 극단주의자가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암살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들은 서안 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확장하며 두 국가 해법의 물리적 기반을 잠식해 나갔다.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하마스와 같은 무장 단체들이 협정을 거부하며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이는 파타가 이끄는 자치정부와 하마스 간의 깊은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2006-2007년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무력으로 장악하면서 팔레스타인은 사실상 둘로 나뉘었다. 오슬로 협정은 평화 조약이 아닌, 신뢰 구축을 통해 점진적으로 평화를 이루려던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점진적 접근은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에게 평화의 싹을 짓밟을 시간과 기회를 주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대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이 진정성이 없다는 확신을, 하마스의 테러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이 믿을 만한 파트너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면서도, 평화라는 중간지대를 파괴하려는 공동의 목표에서는 사실상의 동맹 관계를 형성했다. 그들의 행동은 폭력과 불신의 악순환을 만들어내며 온건파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타협을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귀환자들의 불협화음: 부족 사회 이스라엘의 '귀환법'은 전 세계 모든 유대인에게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한다. 이로 인해 100개국 이상에서 온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 '흩어진 자들의 귀환'은 극심한 사회 통합의 과제를 낳았다. 국가를 세우고 정치, 문화 엘리트를 형성한 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지 유대인과, 늦게 이주하여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중동 및 북아프리카 출신의 미즈라히 유대인 사이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이러한 민족적, 계급적 긴장과 더불어 러시아 및 에티오피아 이민자들의 통합 문제, 세속주의자와 초정통파(하레디) 유대인 간의 깊은 갈등은 이스라엘이 단일한 실체라기보다는 경쟁하는 '부족'들의 모자이크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키부츠에서 '실리콘 와디'로: 혁신의 엔진 초기 이스라엘은 사회주의적, 농업적 이상을 상징하는 '키부츠(Kibbutz)'로 대표되었다. 재산을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이 집단 농장은 국가 건설, 정착, 국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키부츠가 사유화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사회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로 이동하는 더 큰 변화를 반영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스타트업 국가'로 불리며 세계적인 첨단 기술 강국으로 변모했다.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한 기술 허브는 '실리콘 와디'로 알려져 있다. 이 놀라운 변신의 비밀은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의 가장 큰 약점, 즉 안보 상황에 있다. 끊임없는 실존적 위협은 이스라엘이 최첨단 군사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하도록 강요했다. 의무 군 복무 제도는 전국적인 인재 발굴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특히 이스라엘판 NSA(미국 국가안보국)라 할 수 있는 '8200부대'와 같은 엘리트 정보기술 부대는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신호 정보, 데이터 분석, 사이버 전쟁과 같은 분야에서 수년간 집중적인 실무 훈련을 시킨다. 이들은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고, 권위에 도전하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장려받는다('후츠파' 정신). 20대 초반에 전역하는 이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뿐만 아니라, 실전 리더십 경험과 끈끈한 전우 네트워크까지 갖추게 된다. 이 조합이야말로 기술 스타트업을 위한 완벽한 공식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군은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는 거대한 R&D 연구소이자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국가의 폭력적인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설계된 바로 그 제도가 역설적으로 경제 기적의 엔진이 된 것이다. 이는 군사 문화와 기업가 정신의 독특한 융합을 낳았고, 이것이 바로 '스타트업 국가'의 비결이다.
이스라엘의 4000년 여정은 서두에서 제시했던 역설로 다시 돌아온다. 이 역사는 한 민족과 그들의 신, 그리고 특정 땅 사이의 언약이라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가 가진 힘을 증명한다. 이 아이디어는 놀라운 회복력, 문화적 생존, 그리고 눈부신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아이디어는 다른 민족의 역사와 동일한 땅에 대한 권리 주장과 충돌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분쟁과 이산, 비극의 순환을 낳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닫힌 책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쓰이고 있는, 심오하고 중대한 결과를 낳는 이야기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세계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 다음 장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