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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스토리) 집단 광기의 끝장판 - 마녀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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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Witch Hunts)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 봤을 것이다. 마녀사냥은 중세와 근세 유럽, 그리고 미국의 식민지 시대에 걸쳐 발생한 사회적, 종교적 현상이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마녀로 지목하고 이들을 고문하거나 처형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마녀사냥은 특히 15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 유럽과 북미에서 극심하게 벌어졌으며, 수십만 명이 마녀로 고발되고, 수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녀사냥은 종교적 광기, 사회적 불안, 그리고 대중 심리와 편견이 결합된 극단적인 형태의 집단적 광기의 예로 자주 인용되는데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다. ▶ 마녀사냥의 역사적 배경 마녀사냥의 역사는 중세 말기에서 근세 초기에 이르는 유럽의 종교적, 사회적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중세 후기 유럽에서 기독교 교리는 사회의 모든 측면을 지배했다. 당시 교회는 마녀가 사탄과 계약을 맺고 악마의 힘을 사용한다는 신념을 퍼뜨렸다. 교회 지도자들은 악마 숭배와 마법이 기독교 사회를 위협한다고 주장했고, 마녀를 추적하고 처벌하는 것을 종교적 의무로 간주했다. 16세기 종교 개혁과 이에 따른 종교적 분열은 마녀사냥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상대방을 사탄의 도구로 보고, 자신의 신앙을 방어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강화했다. 이 시기에는 종교적 열정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마녀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증대했다. 또한 당시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불확실성이 매우 커지는 시기였다. 유럽 전역에서 기근, 전염병, 전쟁 등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불안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을 찾고자 했고, 마녀를 그 책임자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마녀사냥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의 희생양을 찾는 과정에서 강화되었다. 초기에 마녀사냥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 시기에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마녀사냥을 촉발했다. 1486년,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 출간된 책, 독일의 도미니크 수도사인 하인리히 크라머와 제이콥 슈프렌거가 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은 '마녀의 망치'라는 뜻으로, 마녀를 식별하고 심문하며 처벌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서였다. 첫 부분에서는 마술 혹은 주술이 실제로 존재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사탄의 유혹에 굴하기 쉽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한다. 둘째 부분은 마술의 형태를 설명하고 셋째 부분은 마녀의 식별과 재판, 형벌의 상세한 '지침'을 제공한다. 여성만 희생당했다는 오해도 많다. 하지만 남성들도 많이 피해자가 됐으며 경건하고 인망이 높았던 사람이 희생 당하기도 했다. 사실 마녀재판에 오른 남자도 사탄의 제자라고 부르며 마녀 못지않게 많이 죽었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어인 마녀(魔女) 대신 요술사, 주술쟁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수도 있다. 당시 마녀사냥 광풍이 얼마나 심했냐면 가톨릭에 반기를 들었던 개신교조차도 마녀사냥을 옹호하면서 이 책을 참고했을 정도이니까. 이 책은 마녀사냥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인쇄술의 발달로 널리 퍼졌고, 마녀사냥의 주요 참고서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와 국가 모두 마녀사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특히 가톨릭 교회는 이단과 마녀를 식별하고 처벌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개신교 지도자들 또한 마녀사냥을 통해 종교적 순결을 유지하려 했다. 이로 인해 마녀사냥은 종교적 및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마녀사냥의 전개와 주요 사건 마녀사냥은 유럽 전역에서 발생했지만, 특히 독일, 프랑스, 스위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에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지역들에서는 수많은 마녀 재판과 처형이 이루어졌다. 독일과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마녀사냥이 벌어진 지역으로, 수많은 마녀 재판과 대규모 처형이 이루어졌다. 특히 17세기 초반 독일에서 벌어진 밤베르크 마녀재판(Bamberg Witch Trials)과 뷔르츠부르크 마녀재판(Würzburg Witch Trials)은 수백 명이 처형된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 시기의 마녀사냥은 종교 전쟁과 결부되어 극심한 폭력과 잔혹함을 동반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도 많은 마녀사냥이 발생했다. 특히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매튜 홉킨스(Matthew Hopkins)라는 자칭 "마녀잡이 장군(Witchfinder General)"이 활동하면서, 수백 명의 여성이 마녀로 고발되고 처형되었다. 홉킨스는 마녀를 식별하는 데 사용되는 고문과 '수중 시험(물에 가라앉히는 실험)' 등을 통해 악명을 얻었다. 청교도였던 매튜 홉킨스(Matthew Hopkins) 장군은 내전이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가혹한 마녀 사냥을 집행한다. 그는 끔직하고 추악한 고문을 통해 마녀들을 색출했고, 악마와 마녀와의 성 관계를 밝혀내는데 앞장섰다. 이로 인해 당시 유행하고 있던 마술은 점차 시들해져갔고, 마녀들은 차가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살인자는 영웅으로 추앙 받았다. 스코틀랜드에서도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수많은 마녀재판이 열렸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후에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 왕이 됨)는 마녀사냥을 강력히 지지하며, 마녀사냥을 국가적 캠페인으로 추진했다. ▶ 미국 식민지에서의 마녀사냥 유럽의 마녀사냥은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전파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세일럼 마녀재판(Salem Witch Trials)으로, 1692년 매사추세츠의 세일럼 마을에서 발생했다. 발단은 1692년 1월 20일 매사추세츠의 청교도 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딸 베티 패리스(Betty Parris)와 조카 애비게일 윌리엄스(Abigail Williams)가 발작과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이었다. 두 소녀의 치료를 하던 의사 윌리엄 그릭스는 증상이 낫지 않자 2월 중순쯤 "이들이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는 진단을 내렸다. 이들은 환자들을 저주하고 있는 마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호밀가루와 두 소녀의 소변으로 반죽한 '마녀의 빵'을 개에게 먹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의 추궁에 두 소녀는 남아메리카계 노예 출신 하녀인 티투바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두 소녀는 이후 패리스 목사에게 구걸하러 온 세라 굿과 1년이 넘도록 교회에 나가지 않는 병든 노파 세라 오즈번을 더 지목했고 사람들은 이 세 명을 고발했다. 이런 식으로 공범을 늘려가서 피해자가 늘어나게 된다. 결국 수 일간의 '조사' 끝에 티투바가 자신이 그 둘을 저주했으며 나머지 두 명이 공범이라고 진술했다. 이후 두 소녀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늘었고 애비게일 윌리엄스를 포함한 소녀들이 여러 사람을 마녀로 지목하면서 몇 개월간 마녀 재판이 진행되었다. 세일럼 마녀재판은 미국 식민지 시대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마녀사냥 사건으로, 여러 젊은 소녀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들은 마녀의 마법에 걸렸다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마녀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세일럼 마녀재판은 사회적 불안과 종교적 광기가 결합된 대표적인 예로, 20여 명이 처형되고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 ▶ 마녀사냥의 종결과 원인 마녀사냥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서서히 종결되었는데, 몇 가지 주요 요인이 마녀사냥의 종식을 이끌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계몽주의가 대두되면서, 과학적 사고와 합리주의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마녀사냥의 비합리성과 잔혹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고방식의 변화는 마녀사냥의 종식을 이끄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마녀사냥의 극단적인 사례들은 법적 절차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많은 사람들이 마녀재판의 불공정한 절차와 고문을 통한 자백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법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특히 1692년 세일럼 마녀재판 이후, 사람들은 공정한 재판과 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기독교 교리 내에서도 마녀와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었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마녀사냥의 비합리성과 비윤리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는 마녀사냥의 종식에 기여했다. 사회적, 경제적 안정화가 진행되면서, 마녀사냥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불확실성이 감소했다. 이는 마녀사냥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지받지 못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얻을 수 있는 교훈 마녀사냥은 집단적 히스테리와 대중 심리가 결합된 극단적인 형태의 사회적 광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현대 사회에도 여러 가지 교훈을 제공한다. 마녀사냥은 대중 심리가 어떻게 쉽게 조작될 수 있고, 공포와 편견이 결합될 때 집단적 히스테리가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중요하며, 특히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의 영향을 통해 잘못된 정보가 퍼지고 집단적인 광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마녀사냥은 공정한 법적 절차와 인권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법적 절차의 부재와 고문을 통한 자백의 문제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이는 현대 법체계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마녀사냥은 사회적, 경제적 불안이 심화될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도 경제적 위기나 정치적 불안이 있을 때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사회적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는 마녀사냥의 교훈을 상기시킨다. ★내 생각을 정리하자면, 마녀사냥은 중세와 근세 유럽을 배경으로 주로 일어났지만, 이러한 집단, 대중의 광기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시대를 막론하고 나올 수 있는 특성이라 생각한다. 이 마녀사냥이 일어난 배경과 똑같은 일이 현대 사회에 일어났을 경우 중세시대 그 당시의 마녀사냥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으랴. 현대의 우리도 방심하지 말고 마녀사냥 당시 집단적 광기의 배경, 이것이 촉발된 상황을 잘 살펴봐야 한다.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고, 종교적 열정이 강해지는 시기, 그리고 대중 심리가 결합되는 시점이 위기일 수 있다. 인간의 비합리성, 편견, 공포가 어떻게 사회적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마녀사냥의 역사는 현대 사회에 법적 절차의 중요성, 인권 보호, 그리고 대중 심리의 위험성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며,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 현대 사회의 유사한 문제들을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마녀사냥의 형태가 온라인을 타고 그대로 나타나기도 한다. 집단 광기에 사로잡힌 대중들의 댓글 테러나 마녀사냥 식 어느 특정인을 악마로 몰아가며 매몰시키는 행위가 있다. 이러한 익명성 속에서 자유롭게 글을 자유롭게 작성하면서 어느 특정인을 지목하고 그 안에 법적 절차란 전혀 없고 한 사람을 악마화 시키는 집단 온라인 린치가 있다. 그 사람이 비난받을 만한 근거를 조작하기도 하고 이를 유포하는 자의 개인적 망상에서 만들어내기도 하나, 대중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관계를 따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그대로 똑같은 말을 하니 비판적 사고없이 그냥 믿어버리는 이상한 현상이, 이제는 온라인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형국이다. 마녀사냥이 온라인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는데, 사람들에게는 어느 특정인이 비난받아야 할 합리적 근거나 법적 결과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단지 자신의 분노를 풀 희생양을 찾아다니다 어느 누가 얻어걸려 욕을 하고 동조하고 유포하는 건 아닌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단지 분노를 풀 대상을 찾은 건지. 또 그 희생양의 아픔을 보고 더 희열을 느끼는게 아닌지, 인간 본연의 마음에 이러한 짐승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건 무엇인지, 이것이 대중에 있는 개인의 비합리적 생각이 초래한 결과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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