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체스 게임처럼 느끼기 시작한 건 대학교 시절이었다. 동료들이 단기 과제에 열중하는 동안, 나는 장기적 목표와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는 걸 더 즐겼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보다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더 궁금했던 시기였다. 그때 알았던 건, 내 머릿속은 항상 여러 가능성의 나무로 가득했다. 단순히 현재를 잘 해결하는 게 아니라, 미래 3~5단계 후의 결과를 예측하려는 욕구가 있었다. 이걸 ‘전략적 사고’라고 부르는 걸 처음 들었을 때, “아! 이것이 내가 느끼던 것!”이라고 외쳤다.
내 친구 중 하나가 내 책상 위에 놓인 서적들을 보고 놀란 적 있다. “왜 이렇게 많아?”라는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모르는 건 너무 무서워.”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지식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며, 세상의 복잡함을 해석하는 열쇠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기쁨은 단순한 축적보다 더 깊다. 예를 들어 경제 이론이나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이걸로 사회 문제 해결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자동으로 따라왔다. 나의 지적 호기심은 결코 사치가 아니었다.
어느 회사에서 팀 프로젝트를 맡았던 적이 있다. 동료들이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걸 보면서 솔직히 답답했다. “이렇게 단순한 문제에 왜 20가지 아이디어를 내?”라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내 독립성은 때때로 오만으로 비춰질 만큼 강렬했지만, 사실은 단순한 신뢰였다. “나의 판단이 충분히 정확하다”는 확신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큰 부담일지? 그 책임감에 내 방식을 고수하는 게 오히려 쉬운 선택이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항상 “INTJ가 왜 이렇게 힘들어?”라고 묻곤 한다. 그 이유를 말하려면 먼저 내 일기장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A에서 B로 가려면 C와 D의 경로 중 어떤 게 최적?” 같은 고민이 페이지마다 적혀 있다. 완벽주의는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최고의 기준이다. 하지만 때론 그 기준이 너무 높아지면, 내 팀원들이 “왜 이런 작은 일에까지 신경 쓰시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이때야말로 내가 완벽주의가 아니라 ‘과도한 철학’을 택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한 모임에서 누군가 나에게 “왜 항상 냉소적인 거야?”라고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웃기만 할 수 있었다. 사실 내 머릿속은 그때 다른 이야기로 가득했다. “지금 이 대화, 핵심이 없다.” 같은 판단이 우선순위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냉소성의 배후에는 깊은 감정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큰 실망을 줄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몇 시간 동안 그 상황을 시뮬레이션한다. 외부에 보이는 ‘경직된 표정’과 내면의 ‘충성심’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내게 인생이 체스 같은 이유는 단순히 게임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미래를 예측하려면 현재의 모든 조각을 분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 번은 3년 뒤의 회사 전략을 세우기 위해, 그때 필요한 리소스와 경쟁 구도까지 시뮬레이션한 적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예측 가능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그 반복성은 정확성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완전히 새로운 수법을 사용하기보다, 확실한 전략에 집중하는 게 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너 왜 항상 결론 먼저 내?”라는 질문은 종종 내게 들리는 말 중 하나다. 사실은 단순히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는 게 빠를 뿐이다. 예를 들어, 팀 회의에서 다른 의견이 격렬하게 충돌할 때 나는 “최선의 선택을 보여드릴게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직설성’은 종종 오만으로 받아들여진다. 내 판단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시간 낭비를 싫어할 뿐이다. 감정적인 논쟁에 휘말리기보다는, 현실적 해법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우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