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오디세이 영화 비하인드

시간을 20여 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2004년, 할리우드에서는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우스로 등장하는 대형 프로젝트 《트로이》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는 의외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하지만 놀란이 고대 그리스로 가는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배트맨을 만났고, 꿈속으로 들어갔고, 우주로 떠났으며, 덩케르크 해변을 지나 원자폭탄을 만들던 오펜하이머에게 도착했습니다.
《다크 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오펜하이머》.
그렇게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놀란은 고대 그리스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트로이 목마.
그리고 20여 년 뒤, 마침내 그는 다시 그리스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다른 감독에게 넘겨줄 필요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배우들을 부르고, 거대한 세트를 만들고, 자신이 사랑해온 IMAX 카메라까지 들고 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영화가 《오디세이》입니다.
그런데 제작 비하인드를 들여다보면 놀란이 만들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리스 신화 영화'와 조금 달랐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놀란이 20년 동안 잊지 못했던 것은 ‘트로이 목마’였다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을 하나 고르라면 역시 트로이 목마입니다.
거대한 나무 말.
그 안에 숨어 있는 그리스 병사들.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트로이 사람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목마의 문이 열립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대부분 오디세우스의 천재적인 전략으로 배웠습니다.
하지만 놀란이 바라본 트로이 목마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카메라를 승리한 그리스군 쪽에서 트로이 사람들 쪽으로 돌려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트로이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목마를 신에게 바쳐진 물건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이 이용당했습니다.
그 결과 성문이 열리고 도시가 불탔습니다.
그렇다면 트로이 목마는 정말 영웅의 위대한 업적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믿음을 이용해 도시 하나를 파괴한 끔찍한 계략일까요?
《오디세이》에서는 바로 이 두 시선이 충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를 무너뜨렸다.”
오디세우스에게는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이 순간부터 트로이 목마는 영웅의 훈장이 아니라 오디세우스가 등에 짊어진 원죄가 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이 10년에 걸친 귀향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됩니다.
놀란은 신화를 찍으면서 오히려 ‘신’을 숨기려 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디세이아》에는 신이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제우스가 있고 포세이돈이 있고 아테나가 있습니다. 인간들의 삶에 신들이 끊임없이 개입합니다.
평범한 판타지 영화라면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우스를 등장시키고,
번개를 내려치고,
포세이돈에게 삼지창을 쥐여주면 됩니다.
그런데 놀란식으로 접근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신을 보여주지 않고도 신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까?
포세이돈을 보여주는 대신 바다를 보여줍니다.
거대한 파도가 배를 덮칩니다.
제우스가 직접 번개를 던지는 대신 천둥이 울립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3천 년 전 바다 위에 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포세이돈이 화가 났다.”
아마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재미있는 상상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는 처음부터 신화였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실제로 끔찍한 폭풍을 만났습니다.
누군가는 바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를 봤습니다.
누군가는 이해하기 힘든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집에 돌아와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졌습니다.
조금씩 변하고, 조금씩 과장됐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현실은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됩니다.
놀란이 보여주려는 세계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신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되기 전의 사건을 보여주는 것.
“만약 오디세우스가 정말 존재했다면?”
이 질문을 하나 던져보면 《오디세이》의 제작 방향이 상당히 쉽게 이해됩니다.
호메로스가 기록한 위대한 영웅을 그대로 영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 실제 인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키클롭스도 달라집니다.
세이렌도 달라집니다.
신들도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오디세우스가 달라집니다.
그는 완벽한 영웅일 필요가 없습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그런 복잡한 인간을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듭니다.
실수한 인간은 지혜로운 영웅이 되고,
끔찍한 폭풍은 포세이돈의 분노가 되고,
정체불명의 적은 거대한 괴물이 됩니다.
그렇게 한 인간의 경험이 수천 년 동안 전달되면서 《오디세이아》가 됩니다.
그래서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오디세우스인 동시에,
어쩌면 '이야기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한복판에 트래비스 스콧이 들어온다
여기서 상당히 놀란다운 선택이 하나 등장합니다.
트래비스 스콧입니다.
고대 그리스 영화에 세계적인 힙합 아티스트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이런 생각부터 듭니다.
“도대체 왜?”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아오이도스(Aoidos)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재미있어집니다.
글이 널리 사용되기 전에는 이야기를 노래하고 외워서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누군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다른 지역으로 갑니다.
거기서 다시 노래합니다.
다음 세대가 또 듣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살아남습니다.
생각해보면 현대의 래퍼와 아주 멀리 떨어진 존재만은 아닙니다.
리듬을 이용하고,
언어를 이용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전달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힙합 아티스트를 고대 구전 문화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단순한 깜짝 캐스팅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가 노래하는 대상입니다.
오디세우스입니다.
오디세우스에게 트로이는 끔찍한 기억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것을 노래합니다.
“위대한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를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당사자에게는 평생 지우고 싶은 기억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영웅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 사람의 트라우마가 다른 사람의 전설이 되는 순간입니다.
원작의 모든 장면을 영화에 넣지 않은 이유
물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천 년 전 만들어진 방대한 서사시를 약 3시간짜리 현대 영화의 문법으로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장면도 일부 변형하거나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와 관련된 '우티스(아무도 아니다)' 이야기입니다.
원작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 아니다'라는 뜻의 우티스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폴리페모스가 공격당한 뒤 다른 키클롭스들이 묻습니다.
“누가 너를 공격했느냐?”
폴리페모스가 대답합니다.
“아무도!”
말장난이 핵심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절묘하지만 다른 언어로 옮기고 다시 영상으로 표현하면 원래의 재미와 의미가 그대로 살아나기 어렵습니다.
이런 부분을 과감히 덜어내는 대신 영화는 현대 관객이 따라갈 수 있는 감정선과 갈등을 강화합니다.
즉, 원작의 에피소드를 하나도 빠짐없이 재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오디세우스라는 인간의 여정을 하나의 영화로 다시 만드는 것에 가깝습니다.
시간 가지고 노는 감독이 오디세이를 그냥 시간순으로 찍을 리 없다
그리고 놀란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입니다.
《메멘토》에서는 기억이 뒤집혔고,
《인셉션》에서는 꿈의 층마다 시간이 다르게 흘렀고,
《인터스텔라》에서는 중력이 시간을 바꿨으며,
《덩케르크》에서는 서로 다른 길이의 시간이 동시에 진행됐습니다.
그렇다면 《오디세이》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시간을 뒤틀 수 있을까요?
바로 기억입니다.
현재의 오디세우스가 있습니다.
그러다 트로이 전쟁의 기억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바다 위로 옵니다.
칼립소와 있었던 시간이 끼어듭니다.
현재와 과거가 오갑니다.
이렇게 되면 관객은 단순히 오디세우스의 여행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갑니다.
특히 전쟁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에게 기억은 시간순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어떤 냄새 하나,
어떤 소리 하나,
어떤 사람의 얼굴 하나가 갑자기 과거를 현재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선형 편집은 단순한 '놀란식 퍼즐'이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심리를 표현하는 장치가 됩니다.
그에게 트로이는 10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영화를 굳이 필름으로 찍었다
그리고 이제 제작 자체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IMAX 70mm입니다.
놀란은 오래전부터 대형 필름 포맷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온 감독입니다.
하지만 《오디세이》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15-perforation 70mm IMAX 필름을 전편에 활용하는 도전에 나섭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디지털로 찍으면 훨씬 편합니다.
카메라도 가벼워집니다.
촬영 시간도 관리하기 쉽습니다.
필름을 현상하고 관리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줄어듭니다.
그런데 놀란은 반대로 갑니다.
거대한 필름을 카메라에 넣습니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실제 장소로 갑니다.
거대한 세트를 만듭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을 한 프레임 안에 집어넣습니다.
이 선택은 《오디세이》라는 작품과 묘하게 잘 어울립니다.
이 이야기가 작은 방 안에서 벌어지는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거대한 절벽.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
그 안에 아주 작게 서 있는 오디세우스.
화면이 커질수록 오히려 인간은 작아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비가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더욱 거대하게 만듭니다.
놀란의 40년짜리 꿈은 왜 하필 오디세이에서 완성됐을까?
놀란은 어린 시절부터 IMAX 같은 거대한 영화적 경험에 매료됐던 감독입니다.
그 꿈을 실현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다크 나이트》에서 일부 장면을 IMAX로 촬영했고,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를 거치며 비중을 늘렸고,
《오펜하이머》에서는 기술적 한계를 또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오디세이》에서 전편 IMAX 촬영이라는 목표에 도전합니다.
생각해보면 작품 선택도 절묘합니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이야기해온 가장 오래된 모험담 중 하나를,
현대 영화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포맷으로 다시 찍는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와 가장 극단적인 현대 영화 기술이 만나는 셈입니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놀란에게 단순한 차기작 이상의 의미를 가진 프로젝트처럼 보입니다.
20여 년 전 이루지 못했던 고대 그리스 영화에 대한 생각과 수십 년 동안 발전시켜온 IMAX 촬영 기술이 한 작품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제작 비하인드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결국 ‘진짜와 전설의 경계’다
다만 제작 관련 숫자를 볼 때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온라인에서 알려진 전체 필름 사용량처럼 자료마다 크게 차이가 나는 수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공식 자료를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오히려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제작 방향입니다.
왜 실제 세트를 만들려고 했는가.
왜 거대한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자연으로 나갔는가.
왜 신들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소리와 자연현상으로 표현하려 했는가.
왜 오디세우스를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죄책감을 가진 인간으로 바라보는가.
이 질문들을 하나씩 연결하면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모입니다.
“신화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거대한 키클롭스가 있기 전에 누군가의 실제 공포가 있었을 것입니다.
포세이돈의 저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끔찍한 폭풍을 경험한 선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위대한 트로이 목마 전설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영웅 오디세우스'라는 신화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한 인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20년을 돌아 결국 놀란도 자신의 ‘이타카’로 돌아왔다
그래서 《오디세이》의 제작 과정을 알고 나면 영화 자체가 묘하게 감독의 이야기와 겹쳐 보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오랜 세월 바다를 떠돌다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갑니다.
놀란 역시 2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를 만든 뒤 오래전 만들지 못했던 고대 그리스의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 영화 기술은 달라졌습니다.
감독의 위치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놀란 자신도 20년 전의 젊은 감독이 아닙니다.
2004년에 이루지 못했던 생각을 이제 자신이 원하는 규모와 방식으로 펼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이》의 가장 흥미로운 비하인드는 몇 km의 필름을 사용했는지, 세트가 얼마나 컸는지만은 아닙니다.
한 감독이 20여 년 동안 여러 영화를 거쳐 결국 오래전 만들고 싶었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가 있었다면,
놀란에게는 어쩌면 이 영화가 그런 작품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수천 년 전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던 이야기는 그렇게 거대한 IMAX 필름에 담겨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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