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영화 오디세이 결말해석 :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왜 웃지 못했을까?

20년 만이었다.
10년 동안 전쟁을 했고, 다시 10년 동안 바다를 떠돌았다. 함께 출발했던 동료들은 하나둘 사라졌고, 이제 남은 것은 오디세우스 자신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이타카가 나타난다.
아내 페넬로페가 있는 곳.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는 곳.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가 기대했던 영웅의 표정이 아니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전쟁 영웅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왕좌를 되찾고 가족을 품으면 이야기는 끝나야 한다. 하지만 《오디세이》를 그렇게 보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놓치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은 정말 이타카였을까?
이 질문에서 영화를 다시 바라보면 키클롭스도, 세이렌도, 포세이돈의 폭풍도 전혀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트로이의 어느 밤에서 시작됐다
거대한 목마 하나가 트로이 성문 앞에 놓여 있다.
그리스군은 사라졌다. 오랜 전쟁이 드디어 끝난 것처럼 보인다.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인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밤, 목마의 문이 열린다.
그 안에서 그리스 병사들이 나온다.
성문이 열리고 숨어 있던 군대가 밀려든다. 불길이 치솟고 사람들이 죽는다. 그렇게 난공불락의 트로이는 무너진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보통 이렇게 기억한다.
“역시 오디세우스는 영리했다.”
트로이 목마는 그의 천재적인 계략이고, 오디세우스가 위대한 영웅이라는 증거다.
그런데 카메라를 조금 돌려보자.
이번에는 승리한 그리스군이 아니라 불타는 도시 안에 서 있는 오디세우스를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고 있다.
가족들이 흩어지고 도시가 무너진다.
자신이 생각해낸 계략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직접 바라보고 있다.
그 순간부터 트로이 목마는 더 이상 위대한 전략만으로 남지 않는다.
한 인간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기억이 된다.
어쩌면 오디세우스의 진짜 방랑은 이때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전쟁은 끝났는데, 왜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
트로이는 함락됐다.
이제 배를 타고 이타카로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그 짧아 보였던 귀향길이 무려 10년이 된다.
폭풍을 만나고, 동료를 잃고, 낯선 섬에 도착하고, 괴물을 만난다.
키클롭스가 등장하고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바다는 계속해서 오디세우스를 집에서 밀어낸다.
신화에서는 이것을 신들의 분노라고 설명한다.
특히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끊임없이 그의 귀향을 방해한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질문이 생긴다.
정말 바다만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막고 있었을까?
오디세우스 자신도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쟁터에서는 영웅이면 된다.
살아남고, 적을 죽이고, 승리하면 된다.
하지만 집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는 남편이어야 하고 아버지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기다린 사람들 앞에서 지난 20년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트로이에서 떠날 때의 오디세우스와 지금의 오디세우스는 이미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가고 싶어 하면서도 끊임없이 집에서 멀어진다.
이 모순이 《오디세이》를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이야기로 바꿔놓는다.
키클롭스보다 무서운 괴물은 따로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여행에는 괴물이 끊이지 않는다.
거대한 외눈박이 키클롭스가 길을 막는다.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을 죽음으로 끌어당긴다.
바다는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묘한 느낌이 든다.
오디세우스가 정말 싸우고 있는 것은 이런 괴물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눈을 감으면 다시 떠오르는 트로이의 기억이다.
죽은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부하들.
자신이 내렸던 결정들.
그리고 살아남은 자신.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디세우스 자신은 알고 있다.
영웅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그래서 괴물과 싸워 이길 때마다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억이 그를 기다린다.
키클롭스에게서 도망쳐도 트로이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
폭풍을 빠져나와도 자신의 죄책감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다.
그가 마지막까지 쓰러뜨리지 못한 괴물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었다.
그런데 왜 제우스는 내려오지 않을까?
여기서 《오디세이》의 신들을 바라보는 방식도 흥미로워진다.
하늘에서 거대한 제우스가 내려와 번개를 던질 필요는 없다.
천둥이 치면 된다.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들고 직접 나타날 필요도 없다.
바다가 미쳐 날뛰면 된다.
오디세우스가 탄 배를 집어삼킬 듯한 폭풍을 바라보는 고대의 선원에게 그것은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포세이돈이 화가 났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설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멀리 바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보았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처음에는 누군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정말 거대한 놈이었어.”
다음 사람은 이렇게 전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보다 몇 배는 컸대.”
몇 세대가 지나면 이야기는 이렇게 변한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거인이었어.”
그렇게 현실과 기억과 두려움이 뒤섞이면서 괴물이 태어나고 신화가 만들어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디세이》는 신화를 현실적으로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된다.
평범하지 않았던 현실이 어떻게 신화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 뒤에는 ‘크세니아’가 숨어 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계속해서 이상할 정도로 반복되는 것이 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파리스다.
그는 손님으로 환대받았지만 헬레네를 데려간다.
그 결과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트로이 목마가 등장한다.
트로이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목마를 성 안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믿음은 이용당한다.
마지막에는 구혼자들이 등장한다.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그의 집에 들어와 먹고 마시며 재산을 축내고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요구한다.
세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신뢰가 깨졌다.
고대 그리스에는 이것을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이 있었다.
바로 크세니아(Xenia)다.
낯선 손님을 보호하고 환대하며, 손님 역시 주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다.
이것은 단순히 “손님에게 친절하게 대하세요” 정도의 예절이 아니었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질서에 가까웠다.
그래서 《오디세이》를 크세니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트로이 전쟁과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하나로 연결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이야기가,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면서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불편한 문제가 하나 남는다.
오디세우스 자신 역시 그 질서의 파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드디어 이타카에 도착했는데, 집은 이미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타카.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원했던 순간이다.
그런데 그는 당당하게 왕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이 장면이 중요하다.
왜 바로 페넬로페에게 달려가지 않았을까?
왜 “내가 돌아왔다”고 외치지 않았을까?
물론 구혼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적인 이유가 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바라보면 또 다른 의미가 보인다.
오디세우스는 사람들을 확인한다.
누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누가 배신했는지.
아내는 아직 자신을 기다리는지.
아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결국 그는 집에 도착하고도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몸은 이타카에 도착했지만 마음은 아직 귀향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구혼자들과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된다.
활시위를 당긴다.
화살이 날아간다.
자신의 집을 점령했던 사람들을 하나씩 처단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영웅 서사라면 바로 이 순간이 가장 통쾌해야 한다.
왕이 돌아왔다.
악인을 제거했다.
왕국을 되찾았다.
끝.
그런데 《오디세이》의 결말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구혼자들을 모두 죽였는데도 오디세우스는 왜 완전한 승자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에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고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사람들을 죽인다.
물론 구혼자들은 그의 집과 가족을 침범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단순한 정의 구현으로만 바라보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의 비극이 사라진다.
그는 다시 활을 들었다.
다시 피를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쓰러진 뒤에도 트로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 처단은 복수의 완성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과거와 다시 마주하는 순간이 된다.
그가 정말 되찾아야 하는 것은 왕좌가 아니다.
자신의 삶이다.
페넬로페 앞에서 남편으로 돌아가야 한다.
텔레마코스 앞에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인정해야 한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오디세우스의 진짜 귀향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그의 비극을 ‘위대한 모험’이라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더욱 씁쓸한 부분이 있다.
오디세우스에게 끔찍했던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노래한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지혜로운 영웅.
키클롭스를 물리친 용감한 전사.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낸 위대한 항해자.
죽음의 바다를 넘어 가족에게 돌아온 왕.
사람들은 환호한다.
이야기는 다른 도시로 퍼진다.
사람의 입에서 사람의 입으로 전달된다.
조금씩 과장되고, 조금씩 아름다워진다.
그러면서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남자의 끔찍한 기억은 어느 순간 위대한 영웅의 모험담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오디세우스는 정말 오디세우스였을까?
아니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만들어낸 오디세우스였을까?
당사자에게는 평생 지우고 싶은 기억인데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흥미로운 장면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이것이 신화가 만들어지는 가장 잔인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는 전설이 된다.
그래서 오디세이의 마지막 장면은 처음과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20년 만에 한 남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그를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트로이를 무너뜨렸고, 괴물을 물리쳤으며, 신들의 분노를 견뎌냈고, 결국 왕국까지 되찾았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고 나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는 승리해서 돌아온 사람이 아니다.
살아남아서 돌아온 사람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승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했던 일을 인정하고,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자신이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디세이》에서 말하는 노스토스, 즉 귀향은 이타카에 도착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배에서 내려 땅을 밟는다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왕좌를 되찾았다고 끝난 것도 아니다.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 앞에서 영웅이라는 갑옷을 벗고 상처 입은 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긴 여행이 끝난다.
그리고 여기서 제목인 《오디세이》의 의미도 달라진다.
이것은 괴물과 신이 등장하는 위대한 모험담이 아니다.
전쟁이 한 인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변해버린 인간이 어떻게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오디세우스는 20년 동안 이타카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어쩌면 그가 정말 찾아야 했던 것은 작은 섬 하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트로이에서 잃어버린 자기 자신.
그것이 오디세우스가 마지막까지 찾아 헤맸던 진짜 ‘고향’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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